이 사람의 글을 처음으로 접했던것은. 1999년(으로 기억되는) 어떤이에게서 선물 받은 "깊이에의 강요"라는 단편집이었다.
2003년 7월 어느날...
깊이에의 강요 소묘를 뛰어나게 잘 그리는 슈투트가르트 출신의 젊은 여인이 초대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악의적인 의도는 없었고, 그녀를 북돋아 줄 생각이었다.
「당신 작품에는 재능이 보이고 마음에도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평론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젊은 여인은 그의 논평을 곧 잊어버렸다. 그러나 이틀 후 바로 그 평론가의 비평이 신문에 실렸다.
그 젊은 여류 화가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작품들은 첫눈에 많은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것들은 애석하게도 깊이가 없다.
젊은 여인은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린 소묘를 들여다보고 낡은 화첩을 뒤적거렸다. 완성된 작품뿐 아니라 아직 작업중인 것들까지 전부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물감통 뚜껑을 닫고 붓을 씻은 다음 산책하러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초대를 받았다. 사람들은 비평을 외우기나 있는 듯이 그림들을 첫눈에 일깨우는 호감과 많은 재능에 관해 연신 말을 꺼냈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귀기울여 들으면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젊은 여인은 들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 깊이가 없어요.」
그 다음 주 내내 그녀는 전혀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말없이 집안에 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깊은 바닷속에 사는 무지막지한 오징어처럼 나머지 모든 생각들에 꼭 달라붙어 삼켜 버렸다.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두 번째 주, 그녀는 다시 그림을 그리려 시도했다. 그러나 어설픈 구상이 고작이었고, 때로는 줄 하나 긋지 못하는 적도 있었다. 마침내는 온몸이 떨려 붓을 물감통에 집어넣을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소리질렀다.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세 번째 주, 그녀는 미술 서적을 세심히 들여다보며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화랑과 박물관들을 두루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미술 이론 관련 서적들도 읽었다. 그리고 서점에 가서 점원에게 가장 깊이 있는 책을 한 권 달라고 하였다. 그녀는 비트겐슈타인인가 하는 사람의 책을 받아 들었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립 박물관에서 개최된 <유럽 소묘 5백년>이란 전시회에서 그녀는 어느 미술 교사가 인솔하는 학생들을 따라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앞에서 불쑥 앞으로 나선 그녀가 물었다.
「실례지만, 이 그림에 깊이가 있는지 말씀해 주시겠어요?」
미술 교사는 그녀를 보고 비죽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를 놀리실 생각이라면, 그보다는 더 나은것을 생각하셔야죠, 부인.」
학생들이 깔깔대며 웃었다. 집으로 돌아온 젊은 여인은 몹시 비통하게 울었다. 젊은 여인은 점점 이상해져 갔다. 화실을 비운 적은 거의 없었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다. 깨어 있기 위해 약을 먹으면서도 자신이 무엇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피곤해지면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잠이 깊이 들까 두려워 침대에 눕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밤새도록 불을 켜두었다. 그림은 더 이상 그리지 않았다. 베를린에 있는 어느 미술품 상인이 전화를 걸어 그림 몇장을 청했을 때, 그녀는 전화에 대고 소리쳤다.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에요! 나는 깊이가 없어요!」
그녀는 간혹 점토를 반죽할 때도 있었지만 특별히 무엇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저 손가락 끝으로 후비거나 경단 모양의 작은 덩어리를 빚었을 뿐이었다. 그녀의 외모는 피폐해져갔다. 옷차림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집 역시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여 점차 폐가로 변하였다. 그녀의 친구들이 걱정을 했다. 그들은 말했다.
「그녀를 돌봐 주어야 겠어. 그녀는 위기에 빠져 있어. 인간적인 위기이거나 그녀의 천성이 너무 예술적이어서 그런지도 몰라. 아니면 경제적인 위기일 수도 있어. 첫 번째 경우라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고, 두 번째 경우는 그녀 자신이 극복할 문제야. 세 번째라면 우리가 그녀를 위한 모임을 개최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것조차 그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일지도 몰라.」
그래서 그들은 식사나 파티에 그녀를 초대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매번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은 전혀 그리지 않고 방안에 앉아 우두커니 앞을 응시하거나 점토를 주물럭 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번은 자신에게 너무 절망하여 초대를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그녀를 마음에 들어한 어떤 젊은이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려 했다. 자신도 그가 마음에 들었으니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깊이가 없으니 각오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젊은 남자는 단념했다.
한때 그렇게 그림을 잘 그렸던 젊은 여인은 순식간에 영락했다. 그녀는 외출도 하지 않고 방문도 받지 않았다. 운동 부족으로 몸은 비대해졌으며, 알코올과 약물복용 때문에 유달리 빠르게 늙어 갔다. 집 안 여기저기 곰팡이가 슬기 시작했고, 그녀에게서는 시큼한 냄새가 나기까지 했다. 그녀는 3만 마르크를 상속받았었는데, 그것으로 3년을 살았다. 이 시기에 한번 나폴리로 여행을 갔었다. 어떤 상황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녀에게 말을 건 사람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이 웅얼거리는 소리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돈이 떨어지자, 그 여인은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전부 구멍내고 갈기갈기 찢었다.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탑으로 올라가 139미터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이날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었기 때문에 그녀는 탑 아래 타르 포장된 광장에 떨어져 으스러지는 대신에 넓은 귀리밭을 가로 질러 숲 가장자리까지 날려가 전나무 숲속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즉사했다.
주로 스캔들을 상세하게 보도하는 대중지들이 감지덕지 그 사건에 덤벼들었다. 자살 사건, 바람에 날아간 흥미로운 경로, 한때 전도 양양했고 미모도 뛰어났던 여류 화가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보도할 가치가 아주 높았다. 그녀의 집은 재앙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보였으며 가자들은 환상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수 없이 많은 빈병, 곳곳에 얼굴을 내민 파괴의 흔적, 갈기갈기 찢겨 진 그림들, 사방 벽면 곳곳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점토 덩어리, 심지어 방구석에는 배설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두 번째 톱기사로 다루는 모험을 감행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3면까지 이어 다루었다.
앞에서 말한 평론가는 젊은 여인이 그렇게 끔찍하게 삶을 마감한 것에 대해 당혹감을 표현하는 단평을 문예란에 기고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거듭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또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관심과 예술적인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는 이미 충격적인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인,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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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제까지 받은 몇 안되는 선물중에 ( 특히 책은 ) 하나의 글이다.
오늘로써 약 10번은 읽었다고 생각된다.
난 이제서야 겨우 이 내용을 조금 이해 할 수 있었다.
선물 받은지는 2년 6개월? 한 3년 되어 가는데.
이제까지 나는 이 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퍼뜩 머리를 스치는 느낌. 아. 그렇구나. 이런 내용이었구나.
그런데 왜 이제까지는 내가 알지 못했을까?
난 내 자신에게 깊이에의 강요를 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이 사람의 책을 접한것은 좀머씨 이야기. ( 좀머씨 이야기. 이 책은 다 읽어 보지도 못했다. )
그리고. 몇일전 향수를 읽었다.
태어나자 마자 생선비린내와 온갖 악취가 들끓는 길거리에 버려지고, 몸에서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는 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장 바티스트 그르누이.
그의 출생에서 마지막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이 적혀 있다.
스스로의 태생적 단점으로 고민하고, 그리고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집념.....